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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일학 소식

<잘 살아남았습니다> (청년이 된 학교밖청소년 이야기 #1)

저는 잘 살아남았습니다. 
또 다음을 향하겠습니다.

일하는학교 이아진
(성남 학교밖청소년배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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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의 어느날, 집을 나서며 할머니에게 물었다. 
"만약 내가 30살까지 이 모습 그대로라면, 그때까지의 시간을 살아낼 필요가 있을까?" 

할머니는 조금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렇지는 않노라 대답했다. 
그것만으로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진 채 집을 나서야 했다.

나는 17살 봄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이후 치료가 생각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아 꽤 긴 시기를 방황했다. 
무단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다가 그 해 겨울에 학교를 자퇴했다.
친부의 무자비한 폭력이 처음 시작된 건 내가 사춘기에 접어들 즈음이었다. 그것은 훈육이나 체벌이 아니었고, 술주정과 화풀이였다. 혼나야 할 일은 넘어가고, 혼나지 않을 일로 얻어맞았던 나는 삶의 방향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엔 종교를 찾았다. 열정적인 사역자를 만나 성경에 대해 즐거이 익히고, 신에게 내 상황을 토로하는 과정을 통해 위로를 얻었다. 
14살 때는 여름 수련회에서 "공부로 예배하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받아들였고, 여름방학 전후로 성적이 하위 30%에서 상위 30%로 올랐다. 이후로는 중간등수를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으나 내가 하기로 결심하고 무언가를 해냈다는 사실은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게 해주었다.

[학교 밖의 학교들]
16살 때는 청소년 수련관을 찾아갔다. 청소년 기자단의 신입 기자를 찾는 공고가 교실 앞 게시판에 붙어있었다. 밝고 영리한 태도로 면접을 보고, 45명의 지원자 중 15명의 신입 기자로 선정되었다. 19살 때 까지 활동을 하고, 20살 때는 청소년 재단의 차세대 운영위원회 단장이 되었다. 성남시 청소년 블로그 기자단 활동도 그 해에 함께했다. 나는 영특하고 유쾌했으며, 매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정신병의 증상과 정신과 약의 영향으로 수면 조절이 어려웠다. 단장이나 부단장을 맡았으면서도 무단 결석을 반복했다. 내가 자꾸만 나타나지 않음에 대한 죄책감에 짓눌려 연락도 한참 무시하곤 했다. 소위 말하는 ‘잠수’를 반복적으로 행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런 활동에 도전하는 것이 민폐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3년 정도는 교회를 다니고, 이따금씩 친구를 만나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용돈벌이를 하며 지냈다.

[일하는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
그러던 중 일하는 학교를 찾아갔다. 검정고시 공부를 지원해준다는 광고를 페이스북에서 봤던 것 같다. 각 과목을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은 친절하고 유쾌하면서 다정한 분들이었다.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은 내 또래였고,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학교를 중퇴했고, 가정 환경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쾌했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내는 데에 열심이었다.

[가장 작고 무거운 꿈]
일하는 학교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나는 꽤 밝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겪지 않으면 더 좋았을 일들을 겪었지만, 삶에 고마운 사람들이 많아 여러 고비를 넘겼다. 어떤 면에서는 지독하게 불행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운이 좋았던 것이다. 
참 다행스럽게도. 일하는 학교에서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취득하고, '길찾기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커피 공부도 했다. 당시 계획했던대로 프랜차이즈 카페의 정직원으로 취업할 수 있었고, 그곳에서 퇴사한 후에도 대형 카페에서 직원으로 근무했다. 계속 카페에서 하는 일, 서비스직만이 내가 할 일인 것 같았다. 

사실 아홉살 때부터 쭉 장래희망을 적을 일이 생길 때마다 '작가'라고 썼었다. 글을 쓰며 살고싶었지만 여러 등단 작가들이 좋은 대학교를 졸업했음을 알 때 마다 나는 저 사이에 낄 수 없을 것이라 단념했다. 

꿈을 포기하는 건 너무 슬프니까 축소하기로 했다. 작아진 꿈은 더욱 단단했고, 날카로웠다. 아주 작지만 아주 무거운 돌덩이가 가슴 한 켠에서 내 마음을 찌르곤 했다.

사무직을 해보자고 다짐한 뒤에는 마케팅이 하고싶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들도 좋아하게 만드는 것에 능숙했고, 그래서 즐거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케팅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싶어하는 직무다. 다른 일도 아니고 마케팅을 시키기 위해 저학력 무스펙자를 받아줄 직장은 찾기 어려웠다. 또 마음 한켠으로 꿈을 잠시 치우고, 온라인 교육기관의 운영자로 취업했다. 이후에 온라인 교육 과정을 관리하는 업무를 할 수 있는 회사로 이직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주된 업무는 학습 사이트에 과정을 업로드하는 것이지만, 제안서를 업데이트하며 띄어쓰기와 맞춤법 오류를 수정할 때 즐겁다. 가끔은 브로셔 디자인 기획이나 이메일 광고 기획, 블로그 포스팅 기획을 할 수 있다. 이 회사에 마케팅실은 따로 있지만, 내 업무중에도 마케팅이 있는 것이다. 내가 기획하여 마케팅실 담당자에게 전달하면, 최종 검수를 받은 뒤 결과물이 나온다.

[나와 같은 아픔/고민을 가진 청년,청소년에게 안전하고 지지받을 수 있는 공간과 선생님들이 필요하다]

문득, 나는 정말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혼자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셀프', '사람을 피난처로 삼으면 안된다' 등 "홀로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유행하는 말들 사이에서 나는 생각한다. 
‘사람에겐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공간이 필요하다.’
다년간 함께한 종교, 청소년 수련관, 그리고 '일하는 학교'같은 공간이 필요하다. 

나와 같은 아픔이나 고민을 가진 친구들, 
그리고 고민을 해소할 수 있을법한 지식과 함께 다정한 마음을 갖춘 선생님들이 필요하다. 

이런 곳들이 없었더라면, 있었더라도 내가 접할 수 없었다면. 
나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 채 점점 작고 무거워지는 내 꿈에 짓눌려 죽어버렸을 수도 있다. 
비유적으로 하는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 환자가 자살하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열심히 살아보고자 아둥바둥하지만 비빌언덕을 찾지 못해 타고난 영리함으로 스스로를 공격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젊은 활력은 곧 공격성의 크기가 되어 스스로와 주변을 아프게한다.

아팠지만 낫고자 했던 나, 
지금 아프지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공간들이 더 마련되어야한다.

**성남시는 '일하는학교'를 비롯한 성남지역 학교밖청소년 교육기관들에 대한 예산지원을 2024년부터 중단할것을 검토한다고 합니다. 이것들이 없어진다면 일하는학교를 찾아오는 청(소)년들은 어떻게 나아가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된, 일하는학교를 거쳐 자립하고 있는 청년이 글을 써주었습니다. 자신의 성장과 자립이야기입니다.
이런 글을 공개해도 좋은것인지 고민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온 세상에 이 청년들의 성장과정을 소문내고 싶습니다. 일하는학교가 해온 일들을, 계속 이어가고 싶습니다.

[일하는학교 소개, 후원신청]
www.workingschool.net/264

 

[일학 소개] 조금 늦게, 시작하는 청년들의 진로학교

(영상링크) 일하는학교 오프닝 story EBS방송 "비진학청년을 위한 진로학교" EBS뉴스 - 20대 초중반 청년들의 진로 모색 '일하는학교' [EBS 저녁뉴스]세대를 막론하고 진로를 찾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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